남들은 숫자로 기억하는 그해 일들을, 난 조용히 눈감고 그 시절 거리를 지배했던 빛이랑 공기 톤으로 되짚어보곤 한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MZ세대인 내가 지나온 한국 거리는 나의 색 온도 만큼이나 대비적으로 바뀌었다.
하이 콘트라스트 파스텔톤
중1 때까지, 유년기 막 내리는 줄도 모르고 뛰놀던 거리엔 항상 과장된 빛이 감돌았다. 문방구 앞 쨍한 초록색 천막, 빨강 초록이 조잡하게 빛나던 분식집 간판, 친구 손에 들린 메론소다색 슬러시. 피처폰 픽셀마냥 채도 한껏 올라간 만화책 같던 시절이다. 대비 강한 빛들 사이에서 매일 새로운 색깔의 내일을 기대하곤 했다.
모노톤
열네 살 겨울부터 고3 겨울까지는 세상이 거짓말처럼 빛을 잃었다. 내 뇌가 기억하는 그 시절 거리는 완전히 무채색 흑백이다. 도시가 세련되어지겠답시고 원색 간판 다 철거하고 규격화된 회색 디자인을 입히던 때였다. 나 역시 회색 시멘트 교실 에 갇혀 하교길 학교와 집을 잇는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나는 세상의 다채로움을 인지할 겨를이 없었다.. 색을 빼앗긴 건조한 풍경이었다.
세피아
스무 살 넘어서는 세상에 다시 온기가 돌았는데, 알록달록함이 아니라 찻잎 우려낸 듯한 묵직한 세피아 톤이었다. 거리는 온통 베이지색 벽돌, 우드톤 가구, 노란 전구색 조명st 점포들로 채워졌다. 스마트폰 앱들은 필카 필터를 입혀 세상을 보여줬다. 대학, 취업 준비라는 힘들었던 과도기를 지나며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세피아 색감에 묻었다. 청춘이 영화 같아서 세피아로 기억하는 걸지도 모른다.
약 모노 약 콘트라스트
지금 주변을 둘러보면 온 세상이 블랙, 화이트실버가 지배하는 미니멀리즘 시대다. 세상은 대단히 차분해졌고 본질적인 몇 가지 포인트에만 불을 켠다. 소란 떨던 20대 초반 지나 삶의 무게중심을 잡은 지금 내 상태와 딱 닮았다. 굳이 온 세상에 색 칠하려 애쓰지 않아도, 묵묵한 무채색 일상 속에서 내가 진짜 집중해야 할 것들만 선명하게 바라볼 안목이 생겼다.
나이 먹는다는 건 취향에 맞는 색들만 짚어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또 어떤 색감으로 거리에 칠해질지 내심 기대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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